새벽의 괴담이야기
그리고 중국에서의 추억은 젊었을 적 개고생한 추억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제가 글을 올릴 이유가 없겠죠 중국 소수민족에겐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 있는데 만약 거절할 경우 모독이라 생각하여 칼부림도 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교수님은 포기하지 않고 학자 활동을 하면서 몇 번인가 중국을 더 가셨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고생하지 않는 합법적인 루트로 말이죠 드디어 한중수교가 맺어지면서 정식으로 중국도 여행하고 문물도 주고받는 뭐 그런 시대가 된 거죠 그런데 그 즈음에 어떤 중국 대학교수가 중국의 지방 방언이나 한자 같은 걸 연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자료, 뭐 에를 들면 그들의 언어 같은 걸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교..
그래서 도저히 말이 안 통하고 답답하니까 교수님께서 메모장이랑 볼펜을 꺼내셨습니다 일단 그들도 어느 정도 글자는 쓸 수 있을 테니까 한자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과거에 워낙 중국이 넓어서 서로 언어가 안 통할 때 한자 문화권에서는 종종 이렇게 한자를 통하고 했답니다 그 노인은 메모장과 볼펜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눌러보며 둘러보더니 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이 사람들이 쓰는 한자도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한자라서 뭐라고 쓰긴 쓴 것 같은데 알아보지를 못 하니까.. 한 몇 시간 좀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니까 양쪽 다 지쳐서 그냥 모든 걸 포기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그 마을에서 묵기로 했는데 그 사람들 조금 이상한 점이 보였다고 합니다 일단 교수님..
그래서 그 지저분한 물을 끓여먹어야 하기에 차 문화가 발달했다나? 일단 목이 타들어가듯 마르니까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근처의 강물을 마셨는데 이것 때문에 매일 설사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급기야 잦은 설사로 탈수까지 왔고 밀림을 헤맨지 한 3, 4일쯤 후에는 정말 죽기 일본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운이 좋은 것인지 강을 한참 따라가던 중에 저 멀리 아이들이 발가벗고 노는 게 멀리서 보였답니다 죽기 일보 직전에 사람을 만나니까 너무 반갑더랍니다 아이들이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겠단 마음으로 달려갔는데.. 아이들이 선생님과 친구분들을 보자마자 무서운 거라도 본 듯 경기를 치며 도망치더랍니다 그런 상황에 교수님께선 '여기서 저 아이들을 놓치면 난 죽을 수밖에 없어'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그냥 뛰는 아..
브로커가 말한 루트는 대강 이랬습니다 "우린 강을 통해 밀림을 지나 중국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도착할 거다 거기까지 데려다주겠다" 거기가 무슨 지방 이랬는데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든 좀 울창한 밀림 지역이고 워낙 외져서 중국 공안도 잘 안 찾는 오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밀입국하기엔 비교적 쉬울 것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동남에서 밀입국을 시도하게 됩니다 브로커는 트럭과 지게차를 번갈아서 타고 갔는데 처음에는 자신을 일본의 가전제품 같은 것을 들고 가는 상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은 외제 사치품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하지만 잘 사는 상류층은 알게 모르게 그런 사치품을 사 모으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스릴도 즐길 겸 일단 외제가 더 좋았으니까요 ..
교수님에게 들은 기묘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일단 그 교수님은 중국어 교수님이신데 단순히 중국어만 하시는 게 아니라 중국의 문화나 지역 역사 같은 것도 굉장히 해박하십니다 지금은 나이가 있으셔서 안 되겠지만 젊을 적 직접 중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다고 합니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 그러니까 교수님이 아직 젊었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중국 여행을 하는 게 쉽지만 92년 한중수교 이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중국은 그 당시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였고 실제로 종북주의자들이 중국을 루트로 북한을 가거나 주체사상을 배워오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지금과 다르게 중국을 방문하려면 굉장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는 자기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