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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괴담이야기

[사이비종교] 광란의 집단 의식 아가동산 (신나라 레코드) 본문

공포/괴담

[사이비종교] 광란의 집단 의식 아가동산 (신나라 레코드)

daengo 2020. 3. 12.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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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는 김기순이라는 자로 1940년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남도 부산부 태생으로 본래는 1978년 전라북도 익산의 주현교회 라는 개신교 개열 사이비 종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현교회는 '이교부' 라는 사람이 이끄는 교회로 '삭발교' 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기이한 별칭에 걸맞게 이 주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도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교인들 폭행은 물론 명색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예배 중에 신도들과 함께 옷을 하나하나 벗으면서 껴안고 춤추는 나체 댄스 사건을 일으켜 사회적 큰 물의를 빚은 것이다.

 

이교부는 당시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본 받고자 특유의 스님 같은 차림을 한 것"

 

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체 춤을 춘 것으로 물의를 빚으면서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거기에 충고하러 온 동료 목사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사유가 되어 구속되었다.

 

그리고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고 1981년, 출소 후 주현교회를 해산하였다.

 

1982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리, 도도리 일대의 땅 4000평 남짓을 구입해 '아가농장'이라는 것을 세워 신도들을 모아 아가동산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때 주현교회의 해산으로 갈 곳이 없어진 이교부의 신도들까지 빼내면서 덩치를 불려나갔고 실제로 교주 김기순은 자신을 '아가야'라고 지칭하며 꽃가마를 타고 나타나거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거나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각을 보였다.

 

아가동산은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개신교 종파 같지만 실체는 개신교에서 예수만 빼고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였다

 

예를 들면 찬송가에 나오는 예수 혹은 예수의 상징을 '아가' 혹은 '아가야'라는 말로 치환해서 김기순 자신을 찬송하게 만들거나 기성 종교에 대한 무차별 비난으로써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 종교의 교리는 일단 김기순은 신이고 3살짜리 아기이기 때문에 김기순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이걸 '아가야 법'이라고 불렀고 '신나라에서는 이 법을 따라야 한다'라는 상당히 어이없는 주장을 하였다.

 

아가 농장은 전형적인 노동착취형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농장 관리, 장부 관리, 의료 관리, 학생 관리, 세무 관리 등 관리직을 놓고 철저하게 공동체 생활 및 공동 작업으로 운영되어서 신도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농사짓고 밤에는 공장에서 cd 및 테이프를 만들며 일하는 식으로 원치 않는 투잡을 뛰었다.

 

물론 거기서 번 수익이 어디로 갔을지는...

 

당연하지만 과로로 죽는 사람도 수없이 있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폭행 및 살인, 암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재판에서 폭행과 살해 부분이 무혐의로 밝혀졌다고 하지만 피해 받은 사람들이 증언도 하였던 것으로 봐서는 정말 폭행과 살인이 없었는지는 여전히 진위가 의심스럽다.

 

아가동산에서 신도 3명을 살해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1987년에는 7살이었던 최 모 군이 교주 김기순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주일 동안 굶기고 마구 때려서 죽게 했으며 21살이었던 강 모 씨도 교주의 아들과 사귄다는 이유로 타살당했고 과수원 관리 책임자였던 윤 모 씨도 교주의 말을 잘 안 듣는다며 살해당했다.

 

결국 이 추악한 사실이 밝혀져 핵심 간부 4명이 구속되었다. 교인들에게는 1년에 딱 4번 휴가를 줬는데 신정, 광복절, 크리스마스, 그리고 교주 생일이었다고 한다. 교주 생일에 쉬는 이유는 교주 김기순을 우상으로 하는 연극을 상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신도들은 주말에도 일을 하였으며 텔레비전, 신문, 외부 출입, 가족면회 등 바깥소식을 접하는 건 아예 금지되었다. 가족도 김기순 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 흩어놓고 심지어는 호부호형까지 금지하였다.

 

아버지는 아저씨라 부르고 어머니는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남인 것처럼 대하게 했고 부부끼리 동침도 금지, 신도들이 데리고 간 아이들도 대부분이 중졸 정도의 학력에 병역까지 고의로 면탈하도록 종용했다.

 

또 김기순은 지상 천국을 세운답시고 신도들의 재산 50억 원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으며 김기순의 은신처에 있는 금고에 만 원권 지폐로 현금 7억 원과 1996년 당시 환율로 1600만 원 상당의 달러가 보관 중이었다.

 

이러한 반인륜적 착취 끝에 6년 만에 4000평이었던 땅이 13만 평으로 대략 32배나 늘어났지만 악행과 고혈 위에 쌓은 그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12월 경 아가동산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30여 명의 前 신도들이 검찰에 진정서를 내면서 그 정체가 밝혀졌다.

 

그리고 1997년 김기순에게는 사형을 구형했으며 나머지 간부들은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 사이 노동법 개악 반대 총파업, 한보 사태, 김현철 스캔들 등 숱한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며 아가동산은 점차 잊혀졌고 그해 5월에 수원지법 여주지원에서 당시 신도 사체 암매장 혐의자였던 굴삭기 기사 윤 씨가 진술을 번복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의 무리수 의혹이 퍼져나갔다.

 

결국 주범 김기순은 조세 포탈, 횡령 등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년, 벌금 56억 원을 선고받았고 그나마도 무혐의 처분과 함께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신도 살해와 폭력은 위와 같은 이유로 무혐의로 재판 결과가 나왔으나 아직도 이에 대해 증거하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선 뭔가 의심스럽다는 평이 많았다.

 

또한 그간 사람들을 착취하고 중노동시킨 죄과에 비해서는 너무 가벼운 처벌이라는 의견이 많았으며 과거 아가동산의 노동력 착취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여하튼 김기순이 신도들의 노력을 훔쳐 세운 아가동산은 김기순이 구속되고 난 후 그 세가 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와해되어 1998년 출소 후 김기순은 교주로서의 권력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종교계를 떠났다.

 

하지만 아가동산 간판을 내리고 마지막 남은 사업체인 신나라 레코드를 요긴하게 잘 운영해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과거 아가 동산의 피해자들은 교주 김기순이

 

"그간의 악행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석방 후 죗값도 치르지 않고 세상을 조롱하듯 부를 누리고 있다" 라며 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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