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괴담이야기
[괴담] 조선시대 기묘한 이야기 12가지 본문
1.
1500년대 말엽 즈음에 회자되던 사건 중에 김위(金偉)의 아들이 유괴된 사건은 그 내용이 무척 이상하다.
김위는 개성에서 살고 있는 선비였는데, 어린 아들이 유괴 당한다.
아이를 유괴한 범인은 아이를 이런저런 술수로 속이고 유인해서 끌어들여서 같이 길을 나섰는데,
언덕과 비탈을 넘어서 깊은 산속으로 아이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범인은 아이를 어느 캄캄한 바위굴 속에 가둬 두었다.
아이는 나가고 싶어 울부짖었지만, 바위굴은 나갈 수 없게 막혀있고
빛이 들어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성무에 울고 떨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깊은 산속의 숨겨진 바위굴은 사람은커녕 짐승들도 알아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자서 한참을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아이는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가 지치게 되고, 점차 배고픔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가 배고픔을 느끼게 되었을 무렵,
바위굴의 통로로 누군가 그릇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그릇 안에는 달콤한 단술과 비슷한 죽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어둠 소에서 배고픔에 떨던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 죽을 마셨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 아이는 갇혀서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아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아이에게는 그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음식 그릇 하나가 들어왔다가 나갈 뿐이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견디기 어려운 날에는 풀을 엮어 만든 이불 같은 것이 들어오는 변화가 있을 뿐,
아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말 한마디, 빛 한 줄기 보지 못하고 갇힌 채로 계속 매일을 지냈다.
그런 날들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아이가 발견된 것은 재령의 장수산에서 철광을 캐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고 있던 사람이 광산 개발을 위해 굴을 파다가 우연히 아이가 갇혀 있던 바위굴을 뚫게 되면서 였다.
굴을 파던 사람은 깊은 바위굴 속에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아이를 구조했고,
수소문 끝에 아이의 아버지인 김위는 아이를 되찾게 되었다.
아이를 되찾고 나서 보니,
아이가 아무것도 없는 굴 속에 갇혀서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오직 매일 죽 한 그릇씩만 먹으면서 계속 지냈던 시간은 무려 6년이었다.
아이는 몸은 그런대로 멀쩡해 보였지만,
정신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김위는 온 힘을 다해서 아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집에서 노력했지만,
2년 후 아이는 죽었다.
도대체 범인은 무엇 때문에 김위의 아들을 유괴해서 6년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가둬둔 것일까?
그리고, 6년 동안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고 그 어떤 외부와의 접촉도 없이,
하루하루 끝없이 죽을 먹는다는 행동만 반복하며 살았던 아이가 끝없이 생각하고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원본출전 어우야담 -
2.
1500년대 중반 무렵, 두 선비가 두툰 일 하나가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을 드나들며 공부하던 김윤량(金允良)과 김복창(金福昌)이 싸운 일인데,
김윤량이 불품 없이 먹을 것만 주섬주섬 챙기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김복창이 김윤량을 심하게 조롱하기 위해 찬(贊)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지어서 김윤량을 놀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복창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본 김윤량은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김윤량은 자신이 아는 점술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김복창은 일찍 죽을 것이다"
라고 악담을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복창은 판단력을 잃고 격노하여,
불 붙은 숯덩이를 찍어 들고 김윤량의 입 속에 짓이겨 넣어버렸다.
타오르는 뜨거운 숯덩이가 입 안에 들어온 김윤량은 괴로워 날뛰었다.
좀 더 높은 명망을 떨친 선비들의 또 다른 싸움 이야기로는 이런 것도 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은 자신의 격인 김자전(金自點)과 서로 정치판에서 세력 다툼을 치열하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자점은 심기원의 헛점을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심기원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형벌을 받게 되었다.
심기원은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나무로 만든 형틀 위에 묶이게 되었다.
심기원은 나무로 만든 매로 두들 게 맞은 뒤에
귀양을 가거나 아니면 참수형이나 교수형을 당할 것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관리들은 형틀 위에 심기원을 단단히 묶어 놓더니,
한쪽 다리를 커다란 칼로 내려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심기원은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형벌이냐?"고 물었고
그러자 형벌을 집행하려는 사람은
"김자점 상공께서 분부한 형벌이다."고 대답했다.
곧 심기원은 다리 한쪽이 잘려나갔고
차례대로 나머지 다리와 두 팔도 잘려나갔다.
심기원은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에서 피를 뿌리면서 나뒹굴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몸뚱이만 남아 신음하도록 한 뒤에,
정신을 잃을 때 즈음하여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그 형벌의 끝이었다.
심기원은 형벌을 받으면서, 형을 집행하는 칼을 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대신해서 김자점에게 전해주시오.
당신도 나와 같이 될 거라고."
심기원이 잔혹한 형벌의 희생양으로 이렇게 죽은 지 7년 후
정말로 공교롭게도 김자점 역시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게 되었다.
이후, 이 형벌은 폐지되었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
1700년대 후반에 한 부유한 집에서 사치스러운 음식을 개발해 먹어서 널리 소문이 난 것이었다.
그 음식은 바로 일종의 떡국이었는데,
국 속에 들어가는 떡을 극히 교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귀여운 어린아이의 모양으로 떡을 빚는데,
눈, 코, 입, 귀, 피부를 어린아이와 꼭 같이 정밀하게 만들고
팔과 다리 또한 진짜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음식은 눈으로 보기에 귀엽고,
살아있는 작은 사람처럼 생생하게 꾸미고,
귀로 듣기에 국물 속에서 움직이고,
국물이 스며들고 나올 때에 소리가 먹음직스럽고,
코로 맡기에 냄새가 향기롭고,
혀에 닿으면 맛이 오묘하고,
어린아이 모양의 떡을 이빨로 뜯어 씹을 때
입술과 잇몸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기분 좋게 만든 것이었다.
이 음식은 널리 소문이 났는데,
곧 이 사람은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 사치를 극도로 부리는 자는 망한다는 속설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예로, 1951년 김자정의 가문이 망할 무렵 즈음에,
김자점은 모든 음식이 씹기에 단단하다고 투정을 부려서,
오직 갓 부화한 직후의 병아리만을 구해다가
알에서 겨우 병아리로 변한 그 직후의 상태로 요리하여 씹어 먹었다고 한다.
-원본출전 청성잡기 -
4.
조선시대 뱃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속설 중에 임산부가 배에 타고 바다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 있었다.
당시에도 미신이라는 생각은 있었으나,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이 물속에서 임산부가 물 위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느끼면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화를 내면서 큰 비바람을 불러일으켜서 배를 빠뜨리려 한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항해하는 도중에 위험한 바람과 파도를 맞이 하게 되면,
뱃사람들은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임산부가 없는지 확인하곤 했고,
만약 임산부가 발견되면 다른 사람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식을 갖춘 선비들은 이러한 행동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는 겁에 질린 사람들은 모두 한 뜻으로 임산부를 탓하며 몰아붙이기 마련이었고,
그러다 보면 배에 탄 임산부는 몰린 끝에 물에 뛰어들어 익사하곤 했다.
간혹 임산부가 없을 때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배에 탄 여자를 아무나 임신했다고 몰아붙여서 바다에 내던져 버리는 일도 있었다.
5.
1623년, 평안감사로 재직한 적이 있던 박엽(朴燁)은 군대를 잘 관리하여 그 명성을 떨치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호기롭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구름 모양으로 배를 꾸며 놓고 기생들과 약사들을 그 배에 태워서 안개 낀 강에 배를 띄운 채 뱃놀이를 했다.
그렇게 해서 물 위를 떠다니면서 노는데,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 노는 듯한 흥취를 즐겼다.
박엽은 또한 평양성 성벽 위에 환하게 횃불을 밝혀서 밤에도 성벽이 낮처럼 밝게 빛을 뿜도록 장식해서 그 아름다운을 즐기기도 했다.
박엽은 한편 새롭게 70간 규모의 극장 같은 것을 지어서 평안도 내의 노래를 잘하는 가수 백여 명을 모아 놓고
그 안에서 밤새 노래를 듣고 춤을 보며 즐겼으며, 여러 가지 음란한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런데, 그러던 중 박엽은 한 외국인 주술사에게
"사람 일만을 죽여야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외국인은 점을 잘 치는 것으로 매우 이름이 높은 자였으므로,
박엽은 겁에 질려 떨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운명으로 가기 위해 부하들과 주민들을 하나 둘 처형하기 시작했다.
박엽은 1만 명을 죽인다는 목표로 사소한 잘못을 한 사람들도 모두 사형을 시켰는데,
애초에 엄한 벌을 내려서 군대를 다스린 사람인만큼 군인들이 사소한 죄로 사형시켰고,
나중에는 자신이 놓고 즐기기 위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걷을 때,
세금을 바치는데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사형시키기 시작했다.
박엽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다녀서 점차 평안도 주민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정에서는 김자점이 정권을 틀어쥐면서 반대 세력들을 처단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김자점의 반대파였던 박엽의 혹독한 형벌을 집행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김자점은 박엽을 사형시키도록 하였다.
박엽은 1만 명의 사람을 다 죽이지 못해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박엽에게 죽음을 내린 김자점이 스스로 이름 대신 쓰던 자(字)가 바로,
"일만(一萬)"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이야기는 청성잡기에 소개되어 있는데,
척발규의 이야기와 구조가 같다고 소개하고 있다.
박엽에 관한 내용 자체는 반대파가 박엽의 죄상에 대해 과장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좀 던 앞선 시대의 이야기로는 역시 광평대군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세종대왕은 다섯 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운명에 대해 신분을 숨기고 점을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점을 치는 대상이 광평대군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점을 쳤는데,
그 결과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못 먹어서 굶어 죽을 운명"이라고 예언하였다.
세종대왕은 얼토당토 않은 예언이라고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임금의 아들이 어찌 굶어 죽겠는가?"라고 하면서 역시 점을 치는 것은 미신일 뿐이라고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광평대군에게 사고팔 수 없이 영원히 유지되는 땅에 대한 권리를 내려서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다.
1444년, 20세의 광평대군은 어느 날 밥을 먹다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가시를 뽑을 수가 없었다.
결국 광평대군은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굶어 죽었다.
한편, 조선 건국초에는 복진(卜眞)이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술을 쓰는데 능했다.
복진이 스스로 점을 쳐보니,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알게 되었고,
또 점을 쳐 보니, 자신의 목숨은 임금에게 달려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복진은 임금에게 찾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사정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궁궐 속으로 들어가 임금이 있는 곳까지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마침내 몸을 숨기고 궁월 속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복진은 열심히 몸을 숨기는 방법을 연습해서 자신이 죽을 날짜가 다 와서야 겨우 몰래 궁월 속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복진은 몰래 임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임금에게 목숨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임금은 복진을 보자 깜짝 놀라더니,
"몸을 숨기고 궁궐을 침범해 깊은 곳까지 들어왔으니, 죄가 무겁고, 참으로 위험하다."
라고 하고는, 궁궐 속에 몰래 침범한 죄로 복진을 붙잡아 그 날로 사형시켜 버렸다.
- 원본출전 용재총화 -
6.
1498년 사망한 이륙(李陸)은 광주(廣州)에 사는 80세가 넘은 한 노인이 평생을 살면서 본 가장 이상한 것 두 가지를 듣고 기록에 남겨 놓았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남해에서 본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은 젊은 시절 어떤 사람이 남해 해변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이상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시체를 치워 줄 사람이 없어서 바닷가에 쓰러진 모습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어 낮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죽은 사람의 살이 점차 썩기 시작했는데,
썩은 살이 점차로 웅크러들더니, 점점 모양이 미끌거리는 이상한 작은 덩어리들로 변해 갔다.
곧 이 죽은 사람은 온몸이 수없이 많은 개구리로 변하게 되었다.
이 수많은 개구리들은 죽은 사람의 옷에서부터 튀어나와서 팔딱팔딱 뛰더니 점차 바다를 향해 갔다.
개구리들은 모두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물속에 들어가자 다리를 몸속에 집어넣고 꽁무니에서 꼬리가 돋아나는듯하더니,
모두 평범한 물고기 모양으로 변했다.
잠깐 사이에 이 물고기들은 모두 헤엄쳐서 바다 어디론가 사라져 갔고,
해변에는 죽은 사람의 텅 빈 옷가지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원본출전 청파극담 -
7.
1498년에 사망한 이륙이 남긴 가장 이상한 잉야기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가면놀이에 흠뻑 빠져서 이런저런 가면을 구하며 다녔다.
그런데 나무로 되어 있는 어느 이상한 가면을 발견한 뒤로, 가면을 덮어쓰고 춤추고 노는 일에 더욱 빠지게 되었고,
그와 함께 이상한 병이 전염된 것처럼 시름시름 병을 얻게 앓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병을 얻자 이 집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무당은 "나무 가면이 병을 일으킨다"고 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이상한 가면을 들판에 버렸다.
그랬더니 곧 병이 나았다.
아마도 가면이 얼굴에 붙어서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빨아먹은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몇 달 쯤 뒤에 우연히 가면을 버린 들판에서 다른 사람이 그 가면을 보게 되었다.
가면은 반쯤 썩어 있었고, 그 부분은 버섯으로 변해서 살고 있었다.
버섯이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워서 이 사람은 버섯을 뜯어먹어 보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비실비실 웃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히죽거리면서 웃다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가면을 덮어쓰고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몰골과 같았다.
다른 사람 하나가 또 버섯을 조금 떼어먹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웃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정신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한참 후에 버섯을 먹은 사람들의 발작이 그친 뒤에 물어보니,
"처음에는 웃음이 나면서 기분이 좋고,
나중에는 날뛰고 춤추는 것을 뜻대로 멈출 수 없이 계속되었다."
라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단순히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이 우연히 생겨나 벌어진 일이겠지만,
가면의 모습과 버섯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사람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이상한 생물이라는 느낌도 드는 이야기이다.
- 원본출전 청파극담 -
8.
1528, 성운(成雲)은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아 먼 강상도 땅으로 온 상황이었다.
항상 중앙의 조정과 한성부를 다스리는 직위 정도만을 떠돌던 그로서는 피곤한 여정이었다.
성운은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데 한 몫한 사람으로 악명이 높았고,
때문에 성운 때문에 자신의 친지가 죽었다고 그를 원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원한을 많이 샀던 성운의 죽음은 정신병 발작으로 인한 죽음 기록 중에 유명한 것이다.
성운은 어느 날 대낮에 잠깐 낮잠이 들었다가 가위에 눌리게 된다.
성운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가위에 눌린 상태라서 움직일 수도 없는데 이상한 귀신이 가득 보이기 시작했다.
성운은 자신의 좌우에 기괴한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눈, 코, 입이 없는 살로 되어 있는 얼굴에,
팔다리도 없이 몸뚱이만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고,
머리카락과 이마 부분도 없는 상태였다.
성운을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서 괴로워했는데,
도저히 겁이 나서 그 모습들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눈을 애써 감으려고 하였다.
성운은 이후로 발광하여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중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괴로워하고,
10여 일을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성운은 사망하였다.
- 원본출전 기묘록 속집 -
9.
조선시대의 기생이라는 신분은 노비와 비슷한 수준의 신분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비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1700년대 중반 홍인한(洪麟漢)은 전라도에 감사로 부임했다.
이무렵 홍인한은 해괴한 취미를 개발했는데,
그것은 기생들의 음악을 듣고 변태적인 방법으로 평을 하는 것이었다.
우선 홍인한은 못브이 아름답고 음악에 재주가 많은 기생을 찾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기생을 찾으면, 홍인한은 그 기생을 데려와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홍인한은 기생을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때 쓰는 형구들을 뜰 한쪽에 늘어놓은 채로 노래하거나 악기를 다루게 했다.
홍인한은 유심히 음악을 듣고 기생의 모습을 보면서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 흥취를 즐겼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고 나면 홍인한은 기생을 붙잡아 놓고,
음악에서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지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것 하나하나 마다 죗값을 매겨서 여러 가지 매를 때리는 도구로 기생을 때린다.
기생은 몸을 다치게 되므로 괴로워하는데, 홍인한은 그것을 즐거워한다.
그렇게 해서 음악의 여러가지 내용에 대해 다 이야기하게 되면 기생은 피투성이가 되어 괴로워하게 되고,
홍인한은 자신이 좋아하는 기생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제서야 통쾌하다는 느낌을 느끼면서 껄껄거리며 웃고는 시원하다고 여겼다.
이 이야기는 청성잡기에 간략히 소개된 이야기인데,
조선시대 기생이 학대당한 어두운 이야기들 중에는,
죽창한화에 기록되어 있는 한 황해감사가 1600년대 초에 저질렀던 이야기가 그 추잡하기가 악명 높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
11.
1590년에서 1592년 초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에서는 "등등곡(登登曲)"이라는 이상한 춤을 추며 정신없이 노는 놀이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것은 일부러 정신 나간 행동을 따라 하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 날뛰고 노는 행동이었는데,
주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여서 일부러 바보짓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설치는 것이었다.
히죽히죽 웃는 표정으로 짐승 같은 동작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가 하면,
밤새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뒹굴고 그러다 갑자기 엉엉 울기도 하면서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네."
따위의 말로 서로 소리 지르며 주고받았다.
이 놀이를 할 때에는 기괴한 귀신, 괴물, 도깨비의 모습을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괴상한 옷을 입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겉모습, 사람이 보통 떠올리기 힘든 모습을 일부러 찾아서 몸에 걸치기도 했다.
이들은 무당의 모습이나 기괴한 행색 따위를 일부러 따라 해서 서로서로 미친 모습을 자랑했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정신 나간 듯한 동작만을 계속하며 밤새 놀았다.
이러한 퇴폐적인 기행은 삽시간에 퍼져서 수백 명, 수천 명이 한 데 엉켜서 이런 놀음을 하기 이르렀고,
"한 번 죽음녀 아무 소용없으니, 지금 취하고 배부른 것이 제일이다."
따위의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이 놀이에 심각하게 빠져드는 사람들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무작정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놀기만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걸인이 되는 사람들까지 나타날 지경에 이르렀고,
유명한 선비와 명무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정효성(鄭孝誠), 백진민(白震民),유극신(柳克新), 김두남(金斗南), 이경전(李慶全), 정협(鄭協), 김성립(金誠立) 등이 이 등등곡을 즐긴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단쟁의 상황에서 허망한 느낀 양반 가문에서 은밀한 어떤 일탈적인 취미가 유행했던 것이 갑자기 크게 퍼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의 여러 서적에서는 이것이 임진왜란 직전의 망조를 상징한다는 식의 해석도 통용되었다.
- 원본출전 연려실기술 -
12.
1700년대 후반, 진천(鎭川)에는 유성기(兪聖基)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이 부자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등에 아이를 업은 여자가 거지 문으로 들어오더니,
슬금슬금 유성기가 밥을 먹는 곳까지 들어왔다.
여자 거지는 말없이 대뜸 국을 가져다가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절반을 마셨다.
그리고 여자 거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또 더러운 맨손으로 이런저런 반찬을 엉망으로 주워서 질겅질겅 씹어먹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부자의 하인이 깜짝 놀라서 여자 거지를 넘어뜨리고 두들겨 패버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유성기는 눈짓으로 만류했다.
유성기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먹던 밥을 절반을 덜어서 그 여자에게 주었다.
유성기는 "국과 반찬을 먹었으니, 밥도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여자가 집을 나가자 유성기의 종 하나가 여자를 가만히 따라가 보았다,
여자가 간 곳을 따라가 보니,
마을 앞 숲 속에서 여자가 사라졌고,
숲에 들어가 보니, 여자와 한패로 보이는 일당들이 가득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이들은 협박과 사기를 치는 협잡꾼의 무리들인 듯하였다.
마침 그때는 시비를 걸어서 일부러 몸을 다치게 한 뒤에 관가에 고발한다고 으름장을 놓아서 돈을 뜯는 일 따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느냐?"
여자가 상황을 설명하면서 대답했다.
"인심이 너그러운 사람이라서 차마 그분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두목이 씨익 웃더니, 다시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라도 그 사람은 괴롭히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러면서 그릇은 왜 가져왔느냐?"
여자가 다시 대답했다.
"만약 내가 그릇이라도 들지 않고 빈손으로 왔다면,
나 혼자 다 해 먹고 나서 너를 속인다고 의심하지 않았겠냐"
그리고 나서, 여자는 아이를 업고 있던 포대기를 풀었는데,
그 안에는 죽은 아기 시체가 들어있었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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